“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태어나서, 평생 똑같아지려고 애만 쓰다 죽는다.”
2019년 어느 날, 이 날선 문장을 책에서 마주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전까지 나는 몇 달 동안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공부하고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방향은 남들이 하는 걸 끈질기게 따라가는 일이었다. ‘똑같아지려는 애씀’ 속에 나도 깊이 잠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가게 사정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2017년 익선동에서 ‘녹기 전에’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연 지 3년째, 매일 다른 맛을 만드는 것이 우리만의 특색이라 믿었지만 매출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작은 디저트 숍 하나만 생겨도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고, 근심은 쌓여갔다.
시간이 남아돌자, 원래는 신경도 안 쓰던 인스타그램의 돋보기 탭을 열기 시작했다. 이게 웬일인가, 그 작은 아이콘이 어느새 내 엄지손가락의 단골 코스가 된 것이다. 그 안에는 멋진 사람들이 각자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보는 순간 열등감이 폭발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 하루 다니고 울면서 그만둔 사람인데, 지금 몸담은 F&B 시장은 시각적 결과물이 대세를 좌우하지 않는가. ‘이 안에서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끝없는 의심이 시작됐다.
그 무렵부터 새벽마다 기획·디자인·마케팅 책을 미친 듯이 읽었다. 두세 시간 자고 카페에 앉아 밑줄 긋기를 반복했다. 책 속에서 충만감을 느꼈고, 가게가 잘 안 돼도 ‘이렇게까지 했으니 곧 나아지겠지’ 하는 근거 없는 낙관에 기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잘 알게 되었다’는 착각이었다.
착각은 기묘한 방향으로 흘렀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고 선망하기 시작했던 업계 사람들의 관계망까지 분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밤낮으로 눈팅하며 ‘나도 그들 사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에 빠졌다. 정작 내 자리는 점점 더 흐릿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나는 분명 나로부터 한참 멀어진 상태였다. 남이 하는 게 좋아 보이면 따라 했고, 멋져 보이는 건 내 일에 욱여넣었다. 어느 순간부터 좋아 보이는 것을 좇지 않고는 내 일을 해나갈 수 없게 되었다. 내 기준이 없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무렵 마주한 문장이 벼락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태어나서, 평생 똑같아지려고 애만 쓰다 죽는다.” 지난 몇 달간의 새벽 독서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각성제 같았다.
책을 덮고 걸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책들, 결국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갔다는 얘기잖아. 그렇다면 나는, 이걸 이렇게 읽어서 뭘 얻으려는 거지?”
그날의 독후감은 단 네 글자였다.
“그래서 뭐?”
그 순간, 지난 몇 달의 밑줄들이 조용히 다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책 속에서 발견했던 건 정답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삶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한 예시들이었다는 것을.
그 뒤로 자기 부정을 멈췄다. 못나도, 부족해도 나는 나였다. 오히려 그 결핍이 내 정체성을 만든다고 믿게 됐다. 업계에서 ‘저런 것도 없이 저렇게 날뛰네?’ 하는 포인트. 그 당돌함이야말로 내가 나일 수 있는 증거였다.
이 깨달음은 ‘녹기 전에’의 운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들처럼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인테리어나 완벽한 비주얼에 힘쓰는 대신 매일 새로운 맛을 만들고 작은 기획을 자주 펼치는 과정에 집중했다. 손님이 “오늘 어떤 맛이 있나요?”라고 묻는 날이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 맛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기분을 원하신다면 이걸 드셔보세요.” 내 방식이 오히려 차별점이 되기 시작했다.
컵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가게는 로고가 박힌 컵을 썼지만, 우리는 버려진 밀짚으로 만든 무지 컵을 썼다. 로고를 만들 예산도 자신도 없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단골들이 “로고 없는 컵을 보면 ‘녹기 전에’인 줄 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결핍이 시그니처가 되는 순간이었다.
중요한 배움은 손님들에게서도 얻을 수 있었다. 혼자 와서 먹는 아이스크림 한 컵은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고, 그 모습은 ‘나로 돌아가는 일’ 그 자체였다. 아이스크림과의 독대를 즐기는 그들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부족한 건 정보나 기술이 아니라, 나를 돌아볼 시간이라는 걸.
그렇다. 내 일 안에 정답이 있었다.